집중이슈 3 · 외교 역량과 국가전략
높아진 국력, 한국 외교는 따라가고 있는가
― ‘동맹 관리’에서 ‘국가전략’으로…미국의 요구에 예와 아니오를 결정할 힘이 있는가
한국의 국력은 커졌다.
세계질서도 달라졌다.
그렇다면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한국 외교가 이 두 가지 변화를 얼마나 따라가고 있느냐이다.
국력이 커졌다고 외교력이 자동으로 커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력과 기술력, 군사력과 문화적 영향력이 있어도 그것을 협상카드로 활용하지 못하면 실제 외교력은 커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한국 외교에 필요한 것은 관세와 대미 투자, 방위비와 호르무즈 같은 현안을 하나씩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두 가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첫째는 한국의 외교전략과 외교 엘리트의 사고방식, 정부의 의사결정 시스템이 높아진 국가 위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가이다.
둘째는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의 요구가 한국의 국익에 비해 지나치다고 판단될 경우 그것을 거부하거나 조건을 바꾸고, 그 결과 발생하는 불이익까지 감당할 능력이 있는가이다.
한국 외교의 기본 틀은 아직 ‘동맹 관리’에 강하다
한국 외교의 가장 중요한 축은 오랫동안 한미동맹과 북한 문제였다.
분단국가이고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직접 받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외교관에게도 가장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는 미국과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북한 문제에서 국제공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이 부딪히는 문제를 보면 전혀 다른 능력이 요구된다.
반도체 문제에는 외교와 산업·기술이 함께 들어간다.
배터리 문제에는 통상과 핵심광물 공급망이 연결된다.
미국의 조선업 협력 요구에는 안보와 산업정책이 동시에 포함된다.
원전과 방산, AI와 데이터센터, 관세와 해외투자까지 서로 연결돼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외교는 외교부만 잘한다고 해결할 수 없다.
외교부와 산업부·국방부·기획재정부·과학기술 부처, 대통령실과 기업까지 하나의 국가전략 아래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이 가진 반도체와 조선·원전·방산 능력이 외교협상 테이블에서는 어떤 가치가 있는지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가 요구를 제시한 뒤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요구가 나오기 전에 우리가 줄 수 있는 것과 받을 것, 양보할 수 없는 선과 대안을 준비해야 한다.
전통적인 ‘동맹 관리형 외교’에서 ‘국가전략형 외교’로의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
미국만 한국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한미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
미국이 한국에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북한의 핵위협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확장억제와 한미동맹은 한국 안보의 핵심축이다. 미국은 한국 기업에도 매우 중요한 시장이고 세계 첨단기술과 금융의 중심이다.
그러나 관계의 다른 한쪽도 봐야 한다.
미국 역시 한국을 필요로 한다.
미국이 반도체 생산시설을 자국에 유치하려 하는 것도 한국 기업의 기술과 생산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미국 조선업 재건 과정에서 한국 기업과 협력을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원전과 배터리, 방산 분야에서도 한국이 가진 기술과 생산능력은 협력할 가치가 있는 자산이다.
따라서 한미관계를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것인가’라는 시각만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제 현실에 맞지 않는다.
한국도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진 나라가 됐다.
그렇다면 외교의 질문 역시 달라져야 한다.
“미국의 요구를 얼마나 들어줄 것인가”가 아니라 “미국도 한국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을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국력이 외교력으로 전환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면 무엇을 잃는가
그러나 국력이 커졌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의 요구를 쉽게 거부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거부에는 비용이 따른다.
미국은 한국의 핵심 수출시장이고 첨단기술과 금융, 군사안보에서 중요한 파트너다.
관세가 높아지면 자동차·반도체·철강 등 한국 기업에 직접적인 부담이 발생할 수 있고, 기술규제와 공급망 정책에서도 한국 기업이 불리해질 수 있다.
한미 간 정치적 갈등이 심화된다면 북핵에 대응하는 확장억제와 군사협력에 미칠 영향까지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호르무즈 문제에서도 이런 복잡성이 그대로 나타난다.
한국 정부는 9월 현재 항행의 자유를 위한 여러 형태의 기여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파병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호르무즈 해협은 한국 원유 수입의 61%, 나프타 수입의 54%가 통과하는 항로여서 한국 자신의 에너지 안보와도 직접 연결된다.
따라서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언제나 한국의 국익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데에도 비용이 있다
반대쪽 계산도 반드시 필요하다.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비용이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해외투자가 계속 늘어날 경우 국내 생산과 고용, 산업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따져봐야 한다.
한국이 가진 핵심기술과 제조기반 가운데 어디까지 해외로 이전할 수 있는지도 장기적인 산업안보 차원에서 판단해야 한다.
군사적 요구도 마찬가지다.
국제 해상안보에 참여함으로써 얻는 동맹과 국제사회의 신뢰가 있는 반면, 군사적 충돌에 직접 연루될 위험과 병력의 안전, 상대국의 보복 가능성도 존재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 동맹에 좋다’ 또는 ‘거부하면 자주외교다’라는 단순한 판단이 아니다.
수용에도 비용이 있고 거부에도 비용이 있다.
외교의 실력은 바로 이 두 비용을 정확히 계산하는 데서 시작된다.
거부할 수 있는 힘은 ‘대안’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미국의 요구가 한국의 국익에 비해 과도하다고 판단될 때 한국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큰 목소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외교적 자존심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대안에서 나온다.
미국시장에 문제가 생겨도 다른 시장을 확대할 수 있는가.
특정 국가의 원료와 에너지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공급망을 가지고 있는가.
반도체·조선·원전·방산 같은 핵심 산업을 국내에 유지할 능력이 있는가.
우리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방위능력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일본·호주·유럽·캐나다·인도·ASEAN 등과 특정 문제에서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외교적 네트워크가 있는가.
대안이 많을수록 협상력은 커진다.
반대로 상대가 우리의 유일한 선택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협상력은 약해진다.
외교적 자율성은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지를 축적함으로써 만들어지는 능력인 것이다.
외교 엘리트의 사고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여기에서 한국 외교 엘리트와 정책결정 시스템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과거 외교에서는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주요 국가와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북핵 문제에 대응하는 능력이 중요했다.
앞으로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외교관이 반도체 공급망을 이해해야 하고 산업정책 담당자가 국제안보를 이해해야 한다.
기술과 산업, 안보와 통상, 금융과 에너지를 하나로 연결해 판단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교전략의 기본 방향이 크게 흔들린다면 장기적인 협상력을 축적하기도 어렵다.
미국과 중국의 요구가 발생할 때마다 국내 정치의 진영논리에 따라 ‘친미냐 친중이냐’로 나누는 방식 역시 복잡해진 국제환경을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필요한 것은 특정 국가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라 사안별 국가이익을 계산할 수 있는 전문성과 전략적 사고다.
누구와 가까워질 것인가보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지킬 것인지를 먼저 계산하는 외교가 필요하다.
‘예’와 ‘아니오’ 사이가 외교의 공간이다
강한 외교를 미국의 요구에 자주 ‘아니오’라고 말하는 외교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반대로 동맹을 위해 많은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을 좋은 외교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실제 외교에는 수용과 거부 사이에 훨씬 넓은 공간이 있다.
요구의 규모를 줄일 수 있다.
조건을 바꿀 수도 있다.
시기를 조정하거나 다른 국가들과 부담을 나눌 수도 있다.
군사적 참여 대신 정보·기뢰제거·군수·외교적 기여 같은 다른 방식을 제시할 수도 있다.
투자를 받아들이더라도 국내 생산과 기술을 지킬 조건을 협상할 수 있다.
좋은 외교의 기준은 얼마나 자주 ‘예’라고 했느냐, 얼마나 강하게 ‘아니오’라고 했느냐가 아니다.
한국이 가진 힘을 활용해 얼마나 더 유리한 조건과 더 많은 선택지를 만들어냈느냐가 중요하다.
결국 한국 외교의 ‘체급’을 묻는 문제다
한국은 과거보다 분명히 강해졌다.
경제와 제조업, 첨단기술과 방산, 문화적 영향력까지 한국의 국가적 체급은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국력의 체급과 외교의 체급은 반드시 함께 커지는 것이 아니다.
국력을 협상카드로 바꿀 전략이 있어야 한다.
여러 부처를 하나의 국가이익 아래 조정할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강대국의 요구를 거부해야 할 상황에는 거부하고도 견딜 수 있는 대안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의 요구가 아니라 한국이 스스로 설정한 국가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한국 외교에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은 세계 상위권의 국력을 가지고도 여전히 작은 나라처럼 외교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힘을 협상력으로 바꿀 준비가 돼 있는가.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질문은 같다.
미국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고도 견딜 수 있는 힘과 대안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한국은 더 이상 국제사회가 만들어 놓은 질서 속에서 혜택만을 찾던 국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이나 중국처럼 혼자 국제질서를 결정할 수 있는 초강대국도 아니다.
바로 그 사이에 오늘의 한국이 있다.
높아진 국력에 걸맞은 국제적 책임을 지되, 그 책임의 범위와 대가를 스스로 판단하고 협상할 수 있는 나라.
한국 외교가 이제 그 수준까지 함께 올라갈 수 있는가.
높아진 국력, 한국 외교는 지금 그 질문 앞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