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분석 2 · 반도체·내수·산업생태계
반도체는 날아가는데, 왜 내수와 일자리는 아직 차가운가
문제는 ‘낙수의 유무’가 아니라 ‘확산의 범위’
반도체가 한국 경제를 강하게 끌어올리고 있다. KDI는 올해 수출이 8.7% 증가하고 설비투자도 7.9%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그 중심에는 AI 투자 확대에 따른 반도체 호황이 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호황이 아직 국민 전체의 일자리와 소득, 내수경기로 충분히 확산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 흔히 등장하는 설명이 있다. ‘대기업과 반도체가 아무리 잘돼도 낙수효과는 없다.’ 그런데 최근 한국은행의 연구는 이 문제를 조금 다르게 볼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반도체의 돈은 실제로 소비로 흘러갔다
한국은행은 최근 반도체기업의 대규모 성과급이 실제 소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했다. 반도체 종사자가 많이 거주하는 이천·화성·청주 등의 카드사용액을 다른 지역과 비교했더니 성과급 지급 이후 해당 지역의 소비가 최대 약 4% 더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은 반도체 성과급이 2025~2026년 민간소비를 누적으로 약 1조7천억원 증가시킨 것으로 추정했다.
이 결과는 반도체 호황의 낙수효과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기업의 이익이 근로자의 성과급으로 전달되면 실제 소비가 늘고 지역 상권에도 돈이 흘러간다. 문제는 그 효과가 반도체기업 종사자와 일부 지역에 상대적으로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책의 질문도 바뀌어야 한다. 낙수효과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이미 나타나고 있는 효과를 어떻게 경제 전체로 넓힐 것인가가 핵심이다.
첫 번째 해법 — 반도체를 ‘수출상품’에서 ‘산업 인프라’로
한국은 반도체를 만들어 세계에 파는 데 성공했다. 다음 단계는 반도체와 연결된 AI·센서·데이터·자동화 기술을 한국의 다른 산업이 활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중소 제조업에서는 AI를 이용한 품질검사와 공정자동화를 확대할 수 있다. 물류에서는 AI 재고관리와 배송 최적화, 의료에서는 AI 진단과 행정자동화, 농업에서는 스마트팜, 관광·유통에서는 AI 예약·마케팅과 수요예측을 활용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반도체 성장, AI·자동화 확산, 중소기업·서비스업 생산성 향상, 임금 상승, 소비 증가로 이어지는 새로운 경로가 만들어진다. 반도체를 하나의 수출산업으로 보는 것과 한국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기반기술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산업전략이다.
두 번째 해법 — ‘제2의 삼성전자’보다 수십만 기업의 생산성을 높여라
정부의 산업정책은 흔히 ‘제2의 반도체’를 찾는다. AI·바이오·로봇·배터리·방산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새로운 수출산업은 계속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AI와 로봇 역시 대표적인 기술·자본집약 산업이다. 세계적인 기업 몇 개가 더 생긴다고 수백만 명이 일하는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의 임금이 자동으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산업정책의 질문을 ‘다음 반도체는 무엇인가’에서 ‘반도체와 AI의 기술을 이용해 기존 산업의 생산성을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가’로 넓혀야 한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도 한국이 HBM 등 반도체 경쟁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AI 응용 분야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도체를 잘 만드는 나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반도체와 AI를 가장 잘 활용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세 번째 해법 — 반도체 공장이 아니라 ‘산업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지역에 반도체 공장 하나를 짓는다고 지역경제가 자동으로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공장 주변에 소재·부품·장비기업과 대학, 연구기관, AI기업, 스타트업, 전문서비스 기업이 함께 들어와야 한다.
지역 대학은 기업이 필요한 인력을 교육하고 기업은 공동 연구개발과 현장교육에 참여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도 반도체 클러스터의 성과를 단순히 몇 조원을 투자했는가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몇 개의 협력기업이 성장했는가, 지역 청년의 좋은 일자리가 얼마나 만들어졌는가, 지역기업의 생산성이 얼마나 높아졌는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는 정책에서 지역 산업생태계를 만드는 정책으로 발전해야 한다.
네 번째 해법 —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기술의 낙수’를 만들어야 한다
과거의 낙수효과는 대기업이 돈을 많이 벌면 투자와 고용을 통해 자연스럽게 경제 전체로 퍼질 것이라는 생각에 가까웠다. 그러나 첨단산업에서는 자연스러운 낙수만 기다려서는 부족하다. 정책적으로 기술의 낙수효과를 만들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공동 연구개발, AI·자동화 설비 공동활용, 기술이전, 전문인력 공동교육 등을 확대해 첨단산업에서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가 중소기업으로 이동하도록 해야 한다.
정부가 첨단기업에 세제·전력·용수·산업단지 등의 지원을 제공한다면 국내 협력기업과 기술·인력·사업기회를 얼마나 공유했는지도 지원정책의 평가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결국 내수를 살리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소득’을 만드는 것이다
내수가 부진하면 소비쿠폰이나 할인행사, 금리인하 같은 정책이 먼저 거론된다. 경기가 급격히 위축될 때 이런 정책은 필요하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소비할 돈을 보태주는 것과 지속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소득을 만들어주는 것은 다른 문제다.
반도체 호황을 내수로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기업의 이익을 억지로 소비시키는 것이 아니다. 반도체에서 만들어진 기술·투자·인재를 다른 산업의 생산성 향상과 좋은 일자리로 전환하는 것이다.
한국은행의 최근 분석은 이미 작은 가능성을 보여줬다. 반도체기업의 소득이 근로자에게 전달되자 실제 소비가 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효과를 몇몇 기업과 몇몇 도시에서 한국 경제 전체로 넓히는 것이다.
한국의 문제는 반도체가 너무 강한 것이 아니다. 반도체만큼 생산성 높은 산업과 기업이 충분히 많지 않은 것이 문제다. 따라서 한국 산업정책의 다음 목표는 명확하다. ‘반도체 강국’을 넘어 ‘반도체의 성공으로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나라’를 만드는 것. 그렇게 될 때 반도체 대호황은 수출통계와 GDP에만 나타나는 호황이 아니라 국민이 일자리와 월급, 소비를 통해 체감하는 호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